그땐 대학로에서 집까지 걸어 다녔다. 몇 정거장 안 되는 거리이기도 했고, 걷는 걸 싫어하지 않아서.
그때의 짬인지 근처에 가니 알 것 같았고
더불어 든 생각은, 굳이 내가 성곽길을 걸어왔어야 했나 하는 것.
(사실 그냥 대로 따라 걸으면 그 시간 그 에너지 쏟아 올 필요가 없는 거리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낙산성곽길 오르막을 몰랐기에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알았으면 대로를 따라 걸었지.
아무튼.
혜화동 성당 옆으로 길이 하나 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저기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신학생들이 신부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교이기에 일반인이 구경 내지는 산책 삼아 갈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앱에 쓰인 설명대로라면 입구까지 가는 것이라고 하는데도
가도 되나? 가면 안내판 찾을 수 있으려나?
하면서 조심스럽게 올라간 곳에서 본 안내판.

조용한 공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내려왔다.
그리고 지도를 봤는데.
창경궁 창덕궁 다 지나야 된다.
한참을 걸어야 한다는 얘기.
...응 그래 걷자.
또 힘을 내 보자.
설마 죽을까. 으히히히히힛!
열심히 걸었다.
혜화칼국수가 나를 유혹했지만 가봤자 문 닫았을 거 같아서 걸었다.
(확실치 않다. 브레이크 타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창경궁 주차장을 지날 무렵부터 정신도 혼미하고 배도 고프고.
유혹에 한번 져보기로 했다.
무얼 했느냐.
따릉이를 빌렸습니다. 에헤헷.
따릉이를 타고 창경궁을 지났다.
나 살던 때는 율곡로라는 길이 내내 공사 중이라 편히 지나가본 적이 없었는데 거기는 지하통로로 깨끗하게 다듬어졌더라.
자전거는 서행하라고 써져 있어서 느린 속도로 지나갔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서인지 살짝 오르막, 저단기어일 때 좌우로, 갈之로 신나게 흔들거리면서 겨우 통과했다.
그리고 창경궁 창덕궁을 지나쳤는데 왠지 조금 더 가면 따릉이를 반납할 곳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릉이 지도를 뒤졌는데 내 예감이 맞더라. 그래서 짧은 자전거순례를 마치고 따릉이를 반납하고 다시 걸었다.
아마도 안내와 계도(계도란 표현은... 괜찮나?)로 이제는 많이 조용해진 계동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우리나라 다른나라의 관광객이 참 많았지만 식당들이 대부분 브레이크 타임이라 기웃거리기만 하더라.
나 역시 계동피자 앞에서 한탄을 내쉬다가 또 힘을 내봤다.


생각해 보면 상수도 시설이 있던 때가 아니었으니
우물물이나 샘물 길어서 성수로 썼겠구나 하는 걸 우물 앞에서야 깨달았다.
아쉽게도,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우물에 뚜껑을 덮어서 어쩌면 생길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두었다.
원형의 모습이 아닌 유리뚜껑의 모습인 우물을 보고서 마지막 성지로 향했다.
지도를 보고 올라가다가 또 아무 생각 없이 큰길 따라 간 덕분에 아주 잠깐 헤맸다가
또 한 번의 작은 은총으로 몇 걸음 걷지 않아 왠지 여기가 아닐 것 같단 생각에 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
바른 길로 다시 들어갔다.
북촌길을 지나는 루트로 접어들었는데, 한복을 곱게 입은 외국 아가씨들이 셀카를 찍고 있었고
그들을 지나쳐 가다가 갑자기 보이는 남산타워에 나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높은 곳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어째 우리말보다 남의말이 훨씬 많이 들리는 큰길로 나왔더니 바로 건너편에 마지막 터 가회동 성당이 보였다.
여기까지 왔네.
배고프네 다리아프네 하면서도 무탈하게 왔네.



한옥 성당, 예쁜 성당, 결혼식 하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 성당.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오래된 성당은 내가 하루 열심히 걸은 1코스의 끝이며
내가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은 2코스의 시작이었다.
신기하면서도 벅찬 마음으로 조용히 성당에 들어갔는데
안타깝게도(어쩌면 성당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아래층에 있는, 가회동 성당과 그에 관계된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정리하여 전시한 공간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그리고 밖에 있는 예수님상에서 무탈히 걷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짧게 기도를 드리고 성당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내가 어제 하루 걸었던 1코스의 지도.

가회동 성당 근처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로로 내려와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왔는데
허기짐 때문에 피곤이 가중됐는지 정신없이 자면서 왔다. 제 타이밍에 깨서 환승한 게 용할 정도였다.
집 근처의 칼국수집에서 칼국수와 함께 왜인지 모르겠지만 막걸리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막걸리도 마셨는데
처음으로, 아저씨들이 등산 후에 막걸리를 마시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씻고는 그대로 뻗어서 눈 떴더니 오늘 아침.
폰에 있는 기록을 확인해 봤더니 2만 보 넘게 걸었어요 축하해요 하는 배지가 있었다. 아하핫!

너무 무리해서 걸은 거 아니냐는 식구들과 지인들의 얘기에 웃었다.
싱숭생숭해서 걸은 것도 있고,
대림이라 그런지 자꾸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도 있어서 걸은 것이었다.
답을 찾은 것도 아니고 마음이 차분해진 것도 아니지만
걸어서 좋았다.
복작거리는 거리들이 아니었다면 좀 더 멍 때리고 걸을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점은 아쉽긴 했지만
좋았느냐 나빴느냐 로 묻는다면 좋았다.
날씨를 봐야겠지만, 다음 주에는 2코스를 걸어볼까 한다.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피곤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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