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가 작고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보니 가끔 본의 아니게 집에서 쫓겨날 때가 있다.
오늘도 그랬다.
다큐 같은 예능 야구를 보고 늦게 잠든 탓에 늦은 아침에 일어나 꾸물거리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띵동땡동 하더니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며칠 전 전기 정기검사(혹은 정기 전기검사?!)에서 발견된 문제부품을 교체하는 작업 때문에
점심 무렵 한 시간 정도 단전을 하겠단다.
아 놔.
저 검사 때문에 며칠 전에도 반나절 정도 집을 비웠었는데
오늘도 집에서 나가 있어야 하는구나.
어제라도 안내를 줬으면 좋았으련만 당일 아침에 알려주는 건 무슨 농간인가.
(나는 분명 어제도 집에 있었거늘!)
게다가 오늘은 집에서 데스크톱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오늘까지 넘겨주기로 한 일인데!
그러나 집에 있어봐야 전기도 안 들어오고,
당연히 컴퓨터 못 쓰고,
인덕션으로 조리하니 점심도 못 해 먹고,
냉장고도 못 열 테고,
날씨가 흐릿한데 전깃불도 못 켤 테고.
점심이나 해결하고 서점에서 놀다 와야겠다.
하여 집에서 나왔다. 내 발로 나왔지만 이건 거의 쫓겨난 것 아니겠는가!
어차피 노트북으로는 할 수 없는 작업이라 맘 편하게 휴대전화만 챙겨서 어슬렁거리며 나섰다.

느릿느릿 점심 먹고 서점에 가서
평소엔 잘 보지도 않는 문구류를 진열장 사이사이 다 들어가면서 구경을 하고
섹션마다 돌아다니며 책을 훑어보다가
중간중간 멈춰 서서 제목이나 표지가 눈에 들어오면 몇 페이지씩 읽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보여서 냉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간 보니 작업 끝내겠습니다 하는 시간이 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잠시 다른 곳에도 들러서 장을 좀 보고 천천히 걸어왔는데
핫하...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문이 반쯤 열린 채로 멈춰 있고
아직도 전기가 안 들어온 표시가 온 아파트에서 보이더란 말이지.
시계를 봤는데 작업 끝내겠습니다 시간보다 한 시간 하고 몇 분 더 지나 있는 시간인데.
나 작업해야 하는데. 오늘까지 주겠다고 했는데.
이거...는 계획에 없던 일인데.
이것보다 늦어지면 일에 차질이 생길 텐데!
아 놔.
무엇보다, 내 집은 13층이라 꾸역꾸역 걸어 올라가야 한단 말이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작업을 기다리면서 밖에서 방황하기엔 귀찮아서 느릿느릿 13층까지 걸어 올라왔다.
중간에, 몇 층에서부터 내려왔는지 알 수 없는 동네이웃과도 마주치기도 하면서 올라왔는데
13층까지 올라오니 저단기어가 없는 이 몸뚱아리가 힘드러요힘드러요를 외쳤다.
에휴 비루한 내 몸뚱아리.
집에 들어왔는데 역시나. 현관 센서등도 조용, 멀티탭 노란 불도 조용.
냉장고 돌아가는 낮은 우우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제로 쫓겨났는데! 작업시간도 안 지켜주고!
카톡으로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신나게 투덜거리면서 30분을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원하시는 메뉴를 선택하세요." 하는, 밥솥님의 청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냉장고의 우우웅 하는 소리도 들리고
현관도 갑자기 불이 팍 켜지고
멀티탭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양해해 주셈, 늦었음요.
이라는 안내방송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가장 급한 작업을 시작했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무리 지어져서 예상보다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빠르게 넘겨줬다.
그냥 하루가 되게 어영부영 지나간 것 같은, 아니 날린 것 같은 기분.
이런 일이 한 번씩 터지고 나면 집에 정이 떨어진달까.
나처럼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방안퉁수 안뺑이가 집이 싫어진다.
그렇다고 집만큼 편안한 다른 곳이 있단 얘기도 아니지만.
뭐라도 핑계를 대고 나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마음에다 자갈을 하나씩 던져대면
다음에 살 집은, 아니 진짜 내 집은 이랬으면 좋겠어 저랬으면 좋겠어 하는 생각만 끝도 없이 하게 된다.
당연히 한 시간이면 끝날 일이 두 시간짜리 세 시간짜리 일이 되고.
의식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은 중요한데, 옷이나 음식이랑은 달리 사기도 어렵지만
사지도 못했지만, 오늘 같은 일이 한 번씩 일어나면 조금 찼던 이 집에 대한 정이 쏵 사라지고 쏵 사라진다.
정 떨어진다며 당장 다른 곳으로 갈 데가 있습니까? 라고 누군가가 물으신다면 없어용 이 대답이긴 하지만.
계획에 없던 하루를 보냈으니 이제 계획으로 돌아와서
낮에 사 온 책이나 읽으며 조금은 평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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