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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茶飯事

비누를 만들어 봅시다

by Israzi 2023. 5. 12.

비누를 처음 만든 건 중학생 때.

전교 화장실에서 사용할 비누를 과학부가 만들라, 는 교장선생님의 지시로

폐식용유와 수산화나트륨을 사용해서 비누를 만들었다.

과정 자체가 온전히 전부 기억나는 게 아니라서

비누화값을 어떻게, 누가 계산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안전장치도 환기장치도 없이, 그냥 창문 다 열어놓은 과학실험실에서

과학부와 과학교과목 선생님들이 붙어서 비누를 만들었다.

 

소위 고무다라이 라고 하는 커다란 통에 (깊은 형태 말고 가로로 타원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모양)

물을 담고, 거기에 삽으로 수산화나트륨을 퍼 넣은 후 각목으로 휘휘 저어 녹이고

(학교가 신생학교라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각목은 학교에 널렸었다.)

거기에 몇 명이 교대로 어딘가에서 조달한 폐식용유를 붓고

또 다른 몇 명이 교대로 각목으로 폐식용유+수산화나트륨 수용액을 저어가며 비누화를 시켰다.

 

비누화라는 게, 일정 속도 이상으로 섞어야 진행되는 건데

그때 중딩 꼬맹이들은 오로지 각목과 고무장갑뿐이었고

그걸 힘이 빠질 때까지 저어서 겨우 비누화를 시켰는데

비누를 제대로 만들 수 있게 된 지금 생각해 보니, 폐식용유였기 때문에 비누화가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듯하다.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써보자면,

고무장갑이 부족했던 탓에 나와 다른 친구 하나가 나중에 죽처럼 트레이스가 나려는 상황에서 맨손으로 젓게 됐는데

(하필 그 타이밍 즈음해서 과학교과목 선생님들이 회의 들어가 안 계셨던 게 문제였다.)

둘 다 손톱이 한꺼풀씩 벗겨지고 손바닥이 화끈거리며 난리가 났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타이밍에 선생님들이 오셨고

(아이고, 말을 해주고 갈걸! 그걸 손을 댔니! 라며 엄청 안타까워하셨던 게 기억난다. ㅎㅎ)

둘 다 옆 테이블에서 빙초산 희석액에 손을 담가 통증이 없어질 때까지 중화시켰더란다.

큰 사고 안 나고 그 정도에서 끝났다.

그래서 내가 알아! 양잿물 먹으면 바로 죽지는 않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속이 엉망진창이 될 거야. 아하하하! ㅠㅠ

 

뭐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만든 비누는 고무다라이에서 꺼내는 것도 또 일이어서

채석장에서 돌 깨는 기분으로, 조각도로 금을 긋고 거기에 맞춰서 납작한 판을 대고 딱딱 때려 조각을 냈는데

이렇게 하면 네모 반듯하게 잘리지 않을까 했던 중학생들의 예상을 비웃듯 멋대로 깨져나가 

기왕 만들면서 이쁘게 못 만들었다고 교장선생님께 한 소리 듣는 일까지 생겼다.

무사히 전교 화장실에 비치할 수 있긴 했지만.

 

사는 건 우연의 연속이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탱탱볼의 궤적 같은 것이라서

비누 만들 일이 또 있을까 생각했던 중학생 나는

어른이 되고 여러 일을 겪으며 제대로 된 비누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수산화나트륨 수용액에 겁 없이 맨손부터 대지 않게 됐고

용도와 사용하는 사람에 맞춰서 기름을 배합할 수 있게 됐으며

어떤 첨가물을 넣을지 결정할 수 있게 됐다.

 

멋지군, 나란 녀석! 성장했구나! 핫핫핫!

 

기술을 가진 사람이 됐지만, 번거로운 일인 건 분명해서

쓸 게 간당간당 남을 때까지 절대 만들지 않고 버티는 것도 사실이지. 핫하!

 

하지만 그 "쓸 게 간당간당 남을 때"가 오고야 말았고

그래서 비누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됐다.

 

요번엔 어머니가 명절에 선물 받으셨으나

맛이 이상해 손이 안 간다며 주신 버진코코넛오일과 트러플향이 들어간 올리브오일, 그리고

용기가 빌어먹게 생겨서 기름이 줄줄 샌다며 통탄하며 주신 카놀라유까지 섞어 비누를 만들었다.

원래 계획은 1~1.3kg 정도 만든다였는데, 기름을 어찌나 많이 보내셨는지 다 만들고 나니 3kg이나 되었다. 

그러고도 기름이 아직도 남았다. 이건... 다음에 만들기로.

 

처음 1.2kg은, 설마 이렇게까지 많이 만들까 하는 생각에 여유 부리며 마블링으로 만들어 봤는데

남은 재료를 보고는 이러다간 하루 다 가겠다 싶어서 1.8kg은 그냥 첨가물 다 때려 넣고 한 방에 몰드에 부어버렸다.

 

마블링 때 너무 여유 부렸더니 꽤 시간이 지체됐다!

공방이나 작업장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서 도구와 재료를 펼쳐두고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주방 싱크대 위에서 적당히 만드는 거라서

요번에도 그냥 방바닥에 신문지 깔아 두고 그 위에 몰드 두고 비누액을 좍좍 부어 만들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도구를 다 씻고 뒷정리를 하는데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

"혹시 비누 남은 거 있니? 비누가 떨어졌는데."

 

또 어떻게 아시고 이 타이밍에 전화를 하신 겐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름까지 주셨는데요! 한 달만 기다려 주십쇼! 막 만든 따끈한 비누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또 반나절이 훌렁 지나갔다.

한 달 후에 봅시다, 비누 여러분... 방바닥에 계시니 오며 가며 매일 만나겠습니다만.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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